옛 문서의 글씨가 종이를 뚫는 이유는? 철갈잉크 부식과 기록의 손실
오래된 편지 한 장을 살펴본다고 생각해 보자.
글씨가 없는 여백은 비교적 온전한데, 글자가 쓰인 부분에는 갈색 테두리가 생겨 있다. 어떤 획은 가늘게 갈라져 있고, 잉크가 짙게 모인 곳에는 작은 구멍까지 보인다. 마치 누군가 글자의 모양을 따라 종이를 오려낸 것 같다.
실제 유물의 사례가 아닌, 손상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한 가상의 장면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종이가 오래되어 약해졌거나 벌레가 먹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글씨의 획을 따라 손상이 집중된다면 기록에 사용한 잉크 자체가 원인일 가능성도 살펴야 한다.
이번 글에서 다룰 철갈잉크 부식이 그중 하나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 만든 재료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 기록을 지탱하는 종이를 손상시키는 현상이다.
목차
철갈잉크는 어떤 잉크일까?
철갈잉크는 철 성분과 식물에서 얻은 탄닌류 성분을 반응시켜 만드는 잉크다.
전통적인 제조법에서는 황산철, 오배자류와 같은 식물성 혹에서 얻은 추출물, 물, 아라비아검 등이 사용되었다. 식물성 혹은 곤충 등의 자극으로 식물 조직이 비정상적으로 자란 부분으로, 탄닌 성분이 풍부한 것이 있다. 아라비아검은 식물에서 얻는 수용성 물질로 잉크의 점도와 사용 성질을 조절하는 데 쓰였다.
철과 식물성 성분이 반응하고 산소의 영향을 받으면서 짙은 색을 내는 물질이 만들어진다.
철갈잉크는 유럽의 필사본과 편지, 도면, 행정문서 등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다만 제조법과 재료의 배합은 시대와 제작자에 따라 달랐다. 같은 이름의 잉크라도 실제 조성과 보존 상태까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한국의 옛 문서에 보이는 검은 글씨를 모두 철갈잉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을음과 아교 등을 이용한 먹과는 구분해야 하며, 실제 기록재료는 조사로 확인해야 한다.
글씨를 남기는 잉크가 왜 종이를 약하게 만들까?
종이는 수많은 섬유가 얽혀 형태를 유지한다. 그 섬유의 주요 구성 성분인 셀룰로오스는 작은 단위가 길게 연결된 고분자다.
철갈잉크 부식에서는 이 연결 구조가 손상되는 과정이 중요하다. 크게 보면 산의 영향을 받는 가수분해와 철 이온이 관여하는 산화 반응을 살펴볼 수 있다.
가수분해는 물이 관여해 화학적 결합이 끊어지는 반응이다. 산성 조건은 셀룰로오스의 이러한 분해를 촉진할 수 있다.
한편 반응에 관여할 수 있는 철 이온은 산화 반응을 촉진해 종이 성분의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 여기서 철 이온은 전하를 띤 철 성분을 뜻한다. 종이 위에 금속 조각이 놓여 녹스는 모습과는 다르다.
이러한 반응으로 종이의 강도가 떨어지면 글씨가 쓰인 부분이 작은 움직임에도 갈라지거나 부서질 수 있다.
따라서 철갈잉크 부식은 잉크의 색이 달라지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글씨를 지탱하는 바탕 재료까지 함께 약해질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 여백보다 글씨 부분에 손상이 모일까?
잉크는 종이 전체에 균일하게 놓이지 않는다. 펜이 지나간 획이나 잉크가 고인 지점에 집중된다.
그러므로 잉크 성분에 의한 반응도 기록이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잉크가 많이 묻은 굵은 획이나 겹쳐 쓴 부분은 주변과 다른 상태를 보이기도 한다.
종이가 충분히 약해지면 글자 획을 따라 균열이 생기고, 그 사이의 작은 종이 조각이 떨어져 나갈 수 있다. 이때는 잉크가 흐려진 것이 아니라 잉크가 남아 있던 종이 자체가 사라진다.
다만 잉크의 양만으로 손상 정도를 예측할 수는 없다. 잉크 조성, 종이의 성질, 과거 보관환경과 처리 이력도 영향을 준다.
갈색 글씨라면 모두 부식이 진행된 것일까?
철갈잉크는 시간이 지나면서 검은색이나 청흑색에서 갈색 계열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갈색이라는 이유만으로 철갈잉크라고 확정하거나 심각한 부식 상태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다른 기록재료도 갈색을 띨 수 있고, 같은 철갈잉크라도 색 변화와 종이의 강도 저하가 반드시 같은 정도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존조사에서는 색과 함께 획 주변의 변색, 미세한 균열, 종이의 결손, 뒷면에 나타나는 변화 등을 살핀다.
특히 현재 보이는 손상만으로 지금도 빠르게 악화되는 중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과거 기록과 비교할 수 있다면 변화 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겉모습은 조사할 위치를 알려주는 단서다. 그것만으로 잉크의 종류와 손상 속도를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글씨 주변의 갈색 테두리는 무엇을 알려줄까?
잉크 획 주변으로 옅은 갈색이 번져 보이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이를 후광처럼 보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잉크 성분의 이동과 주변 종이의 열화를 검토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수분이 존재하는 조건에서는 산과 철 성분이 원래 획 주변으로 이동해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갈색 테두리가 보이는 모든 문서를 같은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과거에 물에 젖었거나 다른 오염이 생긴 경우에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보존과학자는 테두리의 형태만 보지 않는다. 종이 앞뒷면의 대응 관계, 다른 얼룩의 분포, 기록재료와 과거 처리에 관한 정보를 함께 확인한다.
철 성분이 검출되면 철갈잉크라고 확정할 수 있을까?
철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정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종이 자체나 다른 안료, 오염물질에도 철 성분이 있을 수 있다. 측정값이 잉크에서 나온 것인지 주변 재료에서 나온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원소를 조사하는 X선 형광분석은 철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원소 분석만으로 잉크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나 반응성을 그대로 알아내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경우 현미경 관찰, 기록재료에 대한 추가 분석, 제한적인 화학시험 등을 함께 검토한다. 이때도 시험 자체가 문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분석의 목적은 장비 이름을 늘리는 데 있지 않다. 어떤 잉크가 사용되었고, 그 잉크가 현재 종이에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확인하는 데 있다.
물로 씻으면 해로운 성분을 제거할 수 있을까?
철갈잉크가 있는 문서에서는 물을 사용하는 처리를 특히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수분은 일부 성분을 이동시키거나 잉크의 번짐을 유발할 수 있다. 약해진 종이가 물을 만나 기계적으로 더 취약해질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모든 수성 처리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수성 처리는 물을 이용하는 처리를 말하며, 전문적인 보존처리에서는 잉크와 종이의 상태를 평가한 뒤 필요한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중요한 차이는 물을 사용하느냐 자체보다 어떤 목적으로, 어떤 조건에서, 어떤 영향을 확인하며 적용하느냐에 있다.
오래된 글씨가 번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임의로 물을 묻히거나 씻어서는 안 된다. 물에 대한 겉보기 안정성과 처리 중 성분의 이동 가능성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종이의 산성도만 낮추면 해결될까?
산의 영향을 줄이는 일은 중요하지만 철갈잉크 부식을 산성화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철이 관여하는 산화 반응도 함께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처리에서는 산성 성분에 대응하는 방법과 반응성 철의 영향을 줄이는 방법을 조합하기도 한다. 피테이트 처리는 이러한 연구와 적용 사례가 있는 방법 중 하나다.
피테이트는 특정 금속 이온과 결합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진 물질이다. 이를 이용해 철이 유해한 반응에 관여하는 정도를 줄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알려진 처리법이라고 해서 모든 문서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연구에서도 모든 평가항목에서 가장 우수한 단일 처리법은 없었으며, 대상의 성질에 따른 선택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잉크가 섞여 있거나 채색·인장·접착 부분이 함께 있는 문서라면 검토할 조건은 더 많아진다. 특정 약품을 사용하면 문제가 끝난다는 식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글씨가 떨어질 것 같으면 뒤에 종이를 붙이면 될까?
물리적인 지지는 약한 문서를 다루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붙이는 재료와 방법에 따라 새로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접착제에 포함된 수분이 기록재료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보강 부위의 두께나 유연성이 주변과 달라질 수 있다. 뒷면의 글씨와 흔적을 가리는 문제도 살펴야 한다.
따라서 보강이 필요한 범위와 사용 재료, 적용 방법을 따로 판단해야 한다.
화학적인 열화를 늦추는 일과 종이를 물리적으로 지탱하는 일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뒤에 지지재가 생겼다고 해서 잉크와 종이 내부의 반응까지 모두 멈춘 것은 아니다.
반대로 화학적 안정화를 검토했다고 해서 이미 끊어진 섬유의 강도가 저절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남아 있는 재료를 어떻게 지지할지는 별도의 문제다.
읽을 수 있을 때 빨리 스캔하면 되지 않을까?
내용을 기록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심하게 약해진 문서는 촬영 준비 과정에서도 손실이 생길 수 있다.
페이지를 들어 올리거나 유리판으로 누르는 행동, 평평하게 펴는 동작이 글씨 부분의 탈락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도 철갈잉크로 종이가 심하게 손상된 자료를 디지털화할 때 별도의 보존 검토가 필요할 수 있다고 안내한다.
따라서 기록 작업에 앞서 안전하게 지지하고 촬영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책이라면 필요한 페이지를 보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펼쳐야 하는지도 문제가 된다.
디지털 기록은 사라질 수 있는 정보를 남기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그 기록을 만들기 위해 원본에 무리한 힘을 가해서는 안 된다.
보존의 목표는 잉크를 없애는 것일까?
철갈잉크가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해서 잉크를 제거하는 것이 보존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잉크에는 문장의 내용뿐 아니라 필체, 획의 흐름, 수정 흔적과 재료 정보가 남아 있다. 보존하려는 기록 그 자체를 이루는 물질이다.
그래서 목표는 남아 있는 글씨와 종이를 최대한 지키면서 추가 손실을 줄이는 데 있다. 대상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보관과 취급 제한이 우선일 수 있고, 보다 적극적인 처리를 검토해야 할 수도 있다.
이미 글씨 모양을 따라 사라진 종이를 원래의 물질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만큼 작은 균열과 탈락 가능성을 일찍 알아차리는 일이 중요하다.
옛 문서의 글씨가 종이를 뚫는 듯 보이는 이유는 기록재료와 바탕 재료가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철갈잉크의 산성과 반응성 철이 종이의 열화를 촉진하고, 약해진 부분에 힘이 가해지면 글씨와 종이가 함께 떨어져 나갈 수 있다.
문서를 보존할 때 종이와 잉크를 따로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문서가 한 장이 아니라 책으로 묶여 있다면 또 다른 어려움이 생긴다. 글씨를 확인하려면 페이지를 펼쳐야 하지만, 잘 펼쳐지지 않는 책을 누르면 종이뿐 아니라 책등과 제본 구조에도 부담이 갈 수 있다.
그렇다면 오래된 책은 어디까지 펼쳐도 괜찮을까?
146편 「오래된 책이 잘 펼쳐지지 않으면 어디까지 열어도 될까? 제본 구조와 열람 각도의 판단」에서는 책의 구조를 존중하면서 기록에 접근하는 방법을 살펴본다.
cho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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