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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 다른 그림이 숨어 있다? 적외선 촬영으로 찾는 밑그림의 비밀

cho007 읽는 시간 약 14분

박물관에서 오래된 그림을 바라보면 우리는 화가가 완성한 최종적인 모습만 보게 된다.

인물의 얼굴과 옷, 배경의 풍경, 건물과 나무, 여러 색의 안료가 만들어낸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다.

그런데 그 그림의 색 아래에 화가가 처음 그렸던 선이 숨어 있다면 어떨까?

처음에는 인물의 손을 조금 더 위쪽에 그렸다가 위치를 바꿨을 수도 있고, 완성된 작품에서는 사라진 인물이나 사물이 밑그림에는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구도를 수정하거나 특정 부분을 다시 그린 흔적 역시 표면 아래에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흔적을 확인하겠다고 수백 년 된 그림의 물감층을 벗겨낼 수는 없다.

문화재 자체가 손상되기 때문이다.

이때 활용되는 대표적인 비파괴 조사 기술 가운데 하나가 적외선 촬영이다.

특히 회화 조사에서는 적외선 반사 촬영(Infrared Reflectography, IRR) 등을 이용해 가시광선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밑그림과 제작 흔적을 조사할 수 있다.

33에서 CT가 문화재 내부를 가상의 단면으로 보여줬다면, 적외선 촬영은 완성된 그림의 색 아래에 숨어 있는 화가의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적외선은 무엇일까?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을 가시광선이라고 한다.

하지만 전자기파에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역도 존재한다.

그 가운데 가시광선의 붉은색 영역보다 긴 파장 쪽에 위치하는 것이 적외선(Infrared)이다.

우리 눈으로 적외선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적절한 카메라와 검출 장치를 이용하면 물체가 적외선을 어떻게 반사하거나 흡수하는지 기록할 수 있다.

문화재 조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일부 회화 재료가 가시광선과 적외선에서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이용하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정보가 영상에서 나타날 수 있다.

완성된 그림 아래의 선은 어떻게 보일까?

회화 작품은 하나의 색층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탕 재료 위에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여러 안료층을 올리는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도 있다.

완성된 작품에서는 밑그림이 색층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부 상부 안료층은 특정 적외선 파장 영역에서 가시광선보다 상대적으로 투과성이 높게 나타날 수 있다.

반면 밑그림에 사용된 탄소계 재료 등은 적외선을 비교적 강하게 흡수하는 경우가 있다.

이 차이가 충분하다면 적외선 영상에서 밑그림이 어두운 선처럼 드러날 수 있다.

마치 완성된 그림 위의 색을 그대로 둔 채 그 아래에 숨어 있는 스케치를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밑그림이 검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적외선 촬영을 하면 모든 그림의 밑그림이 자동으로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밑그림에 어떤 재료가 사용됐는지, 그 위에 어떤 안료가 얼마나 두껍게 올라가 있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적외선에서 상부 색층과 밑그림 재료 사이에 충분한 반사·흡수 차이가 없다면 밑그림이 잘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적외선 영상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이 작품에는 밑그림이 없다”고 바로 결론 내리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단순히 현재의 촬영 조건에서 구분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화가가 처음 그렸던 구도를 볼 수 있다

적외선 촬영이 흥미로운 이유는 완성 작품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제작 과정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완성된 그림에서는 인물의 손이 아래를 향하고 있는데 적외선 영상에서는 처음에 손을 다른 위치에 그렸던 흔적이 발견될 수 있다.

얼굴의 방향이나 옷의 윤곽, 건축물의 위치가 바뀐 흔적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수정 흔적은 화가가 처음부터 완벽한 구도를 머릿속에 가지고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작업하면서 계속 판단하고 수정했음을 보여준다.

완성된 작품에서는 사라진 창작의 과정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림 속에서 사라진 인물이 발견될 수도 있을까?

경우에 따라서는 최종 작품에서 완전히 가려진 형태나 구성이 밑층 조사에서 확인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특정 인물이나 사물을 그렸다가 화가가 마음을 바꿔 그 위를 다른 이미지로 덮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화가가 작업 과정에서 구도나 형태를 변경한 흔적은 작품의 제작 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다만 적외선 영상에서 특정 형태가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숨겨진 인물”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밑그림인지, 다른 제작 흔적인지, 재료 차이에서 발생한 영상인지 다른 조사 결과와 함께 검토해야 한다.

문화재 과학 분석에서 흥미로운 이미지 하나보다 중요한 것은 증거를 종합해 신중하게 해석하는 과정이다.

이런 수정 흔적을 ‘펜티멘토’라고 부르기도 한다

회화 연구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 가운데 펜티멘토(Pentimento)가 있다.

화가가 작업 과정에서 구도나 형태를 수정하면서 원래의 요소가 완성된 그림 아래에 남아 있는 현상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용어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부의 물감층이 변화해 육안으로 이전 형태가 희미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적외선이나 X선 같은 과학적 조사로 발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흔적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화가가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정보다.

밑그림은 화가의 작업 습관을 보여준다

적외선 촬영으로 여러 작품을 조사하면 특정 화가나 작업장의 특징을 비교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어떤 화가는 매우 세밀하게 밑그림을 그린 뒤 색을 올렸을 수 있다.

반대로 간단한 윤곽만 표시하고 채색 과정에서 형태를 크게 수정했을 수도 있다.

여러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선의 특징이나 제작 방식이 있다면 다른 미술사적·재료적 연구와 함께 작품의 제작 과정을 이해하는 자료가 된다.

즉, 밑그림은 단순히 완성되지 않은 스케치가 아니라 작가의 작업 방식을 기록한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적외선 촬영으로 진품과 가품을 구별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적외선 촬영은 작품의 진위 연구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지만 적외선 사진 한 장만으로 진품과 가품을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특정 작가에게 알려진 제작 방식과 크게 다른 밑그림이 발견된다면 추가 조사가 필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화가의 제작 방식이 평생 동일했다고 보장할 수 없고, 제자나 작업장이 제작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후대의 복원과 수정이 존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진위 연구에서는 적외선 촬영뿐 아니라 안료 분석, X선 조사, 자외선 조사, 재료 분석, 문헌 기록, 작품의 출처와 미술사적 특징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적외선과 X선은 같은 정보를 보여줄까?

그렇지 않다.

32에서 살펴본 X선 촬영과 적외선 촬영은 서로 다른 물리적 특성을 이용하기 때문에 보여주는 정보도 다를 수 있다.

적외선 촬영은 조건이 맞으면 상부 색층 아래의 탄소계 밑그림 등을 확인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

반면 X선 영상은 재료의 밀도와 구성 원소, 두께 등에 따른 X선 흡수 차이를 이용한다.

따라서 회화 작품의 특정 안료층이나 구조적 요소가 X선 영상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같은 그림을 적외선과 X선으로 각각 조사하면 서로 다른 층과 제작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분석 방법으로 모든 비밀을 찾으려 하기보다 여러 조사 결과를 겹쳐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외선 카메라만 있으면 누구나 조사할 수 있을까?

일반 카메라에도 적외선과 관련된 기능이 있고 시중에서 적외선 촬영 장비를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재 적외선 조사는 단순히 카메라를 작품 앞에 놓고 촬영하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파장 범위를 기록하는지, 어떤 검출기를 사용하는지, 조명을 어떻게 배치하는지, 작품의 크기와 표면 상태가 어떤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촬영 후 만들어진 영상에서 보이는 패턴을 정확하게 해석해야 한다.

검게 나타난 선이 밑그림인지, 균열이나 오염인지, 다른 재료의 특성 때문인지 구분하려면 작품에 대한 이해와 다른 조사 자료가 필요하다.

그래서 문화재 과학조사에서는 장비보다 해석 능력이 중요할 때가 많다.

대형 그림은 어떻게 적외선으로 촬영할까?

작은 회화 작품이라면 한 번에 전체를 촬영할 수 있지만 대형 작품은 카메라의 해상도와 촬영 범위 때문에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촬영해야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일정한 조건을 유지하면서 작품의 각 부분을 순서대로 기록한 뒤 여러 이미지를 연결해 전체 영상을 만들 수 있다.

작은 촬영 오차가 누적되면 이미지가 정확하게 맞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촬영 위치와 조명, 초점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완성된 적외선 이미지는 미술사 연구뿐 아니라 이후 문화재 상태를 비교하는 기록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다.

보존처리 전 적외선 촬영을 하는 이유

오래된 회화 작품을 보존처리하기 전에 표면 아래에 어떤 정보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세척이나 보존처리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제작층과 후대의 보수층을 구분해야 할 수 있다.

적외선 촬영으로 밑그림과 일부 제작 흔적을 기록해 두면 처리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를 잃는 위험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보존처리는 문화재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작업이므로 가능한 한 처리 전에 다양한 기록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앞서 다뤘던 컨디션 리포트와 최소 개입 원칙과도 연결된다.

디지털 적외선 기록도 미래의 자료가 된다

적외선 촬영으로 얻은 이미지는 한 번 연구하고 버리는 사진이 아니다.

촬영 조건과 작품 정보를 함께 기록해 보관한다면 미래의 연구자가 다시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기술이 발전하면 과거에 촬영한 데이터를 새로운 방식으로 분석할 수도 있다.

또한 가시광선 사진과 적외선 이미지, X선 이미지 등을 디지털 환경에서 비교하면 서로 다른 층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문화재의 표면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제작 정보까지 디지털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적외선 촬영은 문화재를 훼손하지 않을까?

적외선 반사 촬영의 큰 장점 가운데 하나는 문화재에서 시료를 직접 떼어내지 않고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비파괴 조사 방법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비파괴라는 말이 아무런 주의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회화 작품을 촬영 장소로 이동하거나 세워 놓는 과정에서 물리적 위험이 발생할 수 있고, 조명 조건 역시 문화재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매우 약해진 작품이라면 촬영을 위한 이동 자체가 부담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분석 방법뿐 아니라 조사 과정 전체에서 문화재의 안전을 고려해야 한다.

그림 한 장에는 여러 시대가 겹쳐 있을 수 있다

오래된 회화 작품을 하나의 이미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여러 시간의 흔적이 층처럼 쌓여 있을 수 있다.

처음 만들어진 바탕층이 있고 그 위에 밑그림이 있다.

화가는 채색하면서 형태를 수정했을 수 있고 완성된 뒤에는 바니시나 보호층이 추가됐을 수도 있다.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뒤에는 손상된 부분을 누군가 다시 보수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그림의 표면은 작품이 지나온 모든 시간 가운데 가장 바깥쪽에 보이는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적외선과 X선, 자외선 같은 과학적 조사 기술은 이 여러 시간의 층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완성된 그림 아래에는 화가의 고민이 남아 있다

우리는 박물관에서 완성된 명화를 보며 화가가 처음부터 모든 구도를 완벽하게 계획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적외선 조사에서 나타나는 밑그림과 수정 흔적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선을 그었다가 지우고, 인물의 위치를 바꾸고, 손의 방향을 수정하고, 필요 없는 요소를 다른 색으로 덮었던 과정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적외선이라는 눈을 통해 화가가 그림을 완성해가던 순간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다.

32편의 X선 촬영이 문화재의 숨겨진 내부 구조를 보여주고, 33편의 CT가 그 구조를 3차원으로 재구성했다면, 34의 적외선 촬영은 회화 작품의 숨겨진 제작 과정을 보여준다.

문화재 보존과학의 핵심은 작품을 무조건 분해하고 시료를 떼어내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가능한 한 원본에 손을 대지 않으면서 빛과 방사선, 디지털 영상 기술을 이용해 더 많은 정보를 얻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적외선 촬영을 통해 발견되는 밑그림의 작은 선 하나는 단순한 검은 흔적이 아니다.

그 선은 수백 년 전 화가가 처음 붓이나 드로잉 도구를 움직였던 위치이며, 완성된 작품에서는 사라져버린 창작 과정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그림 표면에 자외선(UV)을 비추면 무엇이 보일까?

35편에서는 육안으로는 비슷해 보이는 부분이 자외선 아래에서 서로 다르게 빛나는 이유와 이를 통해 과거의 복원 흔적과 바니시 상태를 찾아내는 방법을 이어서 살펴볼 수 있다.

cho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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